윌리엄 윌버포스의 전기 영화인 어메이징 그레이스 스틸 컷.
오늘날 ‘다양성(Diversity)’은 시대를 관통하는 화두 중 하나다. 세상이 저마다의 색깔을 지니고 사람의 모습이 다채롭듯 다름을 포용하는 사회는 마땅히 지향해야 할 가치다. 다만 지난 수십 년간 시대정신으로 불려 온 포스트모더니즘은 ‘서로 다른 견해를 포용한다’는 다양성의 존중과는 결이 다르다. ‘서로 다른 진리라도 모두 똑같은 진리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치닫기 때문이다. ‘보편적 진리의 오용을 경계하라’는 명제를 넘어 ‘보편적으로 타당한 진리란 존재할 수 없다’는 극단적 상대주의로 전락하고 말았다. “너의 진리”와 “나의 진리”만 인정할 뿐 “모두를 위한 진리”는 거부한다. 초월적 진리를 부정하는 것도 모자라 초월적 도덕마저 제한적, 억압적이란 이유로 비판한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는 기독교인은 종종 미움과 박해의 대상이 되고 기독교는 다양성을 짓밟는다는 프레임에 갇힌다.
물론 포스트모던이 위선적 정의를 해체하고 기만적 권력을 폭로한 공로는 부정할 수 없다. 권력은 때로 자신의 욕망을 정의라 불렀고 시대의 편견을 영원한 질서로 포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상은 거짓 정의를 폭로하는 것과 정의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정의 자체’를 뒤흔드는 패착을 남겼다. 정의의 탈을 쓴 거짓을 간파하기 위해서라도 한 차원 높은 정의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을 간과했다. 분명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자의적이고 독선적인 것은 문제였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준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은 결국 파멸적 결과를 낳고 만다. 거짓 보편성을 걷어내고도 남아 있을 “진정한 보편성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무엇이 ‘옳고 그름의 영역’인지, 개인의 자율에 맡겨 둘 ‘용인의 영역’은 어디까지인지를 가려낼 공동체의 기준을 올바르게 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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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지。에서 법과 정의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다.
먼저 정의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도전부터 본다. 절대적 도덕의 계보를 의심했던 니체부터,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분석한 푸코, 텍스트의 긴장과 위계를 드러낸 데리다,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을 말한 리오타르에 이르기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은 보편적 정의에 관한 주장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해체했다. 물론 저마다 문제의식이 다른 이들의 사상을 하나로 뭉뚱그려 “포스트모던은 곧 진리 해체”라고 단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사상이 대중에 널리 퍼지면서 “절대적 기준은 없다”는 해체적 결론만 남고 “권력을 경계하라”는 원래의 비판적 통찰은 증발했다는 。이 문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에서 절대적 기준의 실종은 역설적으로 권력이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는 거대한 진공 상태를 만들어 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낙관적 전망과 달리 초월적 기준을 제거한다고 자유가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 기준을 정하는가’라는 권력의 문제가 불거진다. 진실을 판별할 공통의 기준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결국 가장 강한 자가 무엇이 진실인지를 결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탈진실(Post-truth)은 이 힘의 논리가 전면에 등장한 결과다.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 ‘누가 말했는가‘가 판단의 잣대로 작용하고 진실의 탐구는 종종 진영의 논리에 압도당한다. 여기에 알고리즘이 강화하는 확증편향, 소셜미디어의 정보구조, 전통적 권위에 대한 신뢰 붕괴, 적대적인 정치적 양극화도 한몫 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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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초월적 기준이 사라진 사회에서 권력의 자의성이 커지다 보니 교묘하고 복잡한 악법을 찍어내는 입법, 법 집행을 빌미로 자의적 통제를 일삼는 행정, 상위법의 통제나 국민적 합의마저 외면하는 사법이라는 권력구조의 전체주의적 토양이 자라난다. 탈진실이 문화적 일탈을 넘어 전체주의로 향하는 지름길인 이유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전체주의가 원하는 시민은 단순히 거짓말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일 자체를 포기한 사람이라는 .이다.
법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도전도 여기서 출발한다. 보편적 도덕률이 사회적 준거로 자리 잡았던 시대엔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적 기준이 한층 선명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법을 ‘공동선을 향한 이성의 명령’이라 정의했듯이 실정법은 자연법이라는 실질적 도덕률을 수용하여 성문화한 규범 구조였다. 물론 자연법 전통이 강했던 시대의 실정법이 언제나 정의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당시엔 법 위에 법을 심판하는 또 하나의 척도, 바로 ‘법 너머의 정의‘가 존재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법을 더 이상 이렇게 바라보지 않는다. ‘공동체가 옳고 그름에 관한 규범적 판단을 공적 질서로 구체화한 제도’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힘 있는 자가 사회를 통제하는 기술로 전락했다는 냉소마저 나온다. ‘국가 강제력을 뒷받침하는 기술’이나 ‘사회 통제를 위한 정책 수단’을 넘어 심지어 ‘허구적 유토피아로 대중을 조종하는 도구’로 바라보는 시각까지 등장한다. 실제로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이 ‘인민의 이름으로’ 제정한 각종 법령은 절차적으로 흠결이 없었을지라도 이를 평가할 도덕적 잣대가 무너진 순간 하나같이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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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이념이나 정치적 목적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법제화하려는 오늘날의 모든 시도도 법을 바로잡을 ‘법 너머의 기준’이 사라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법의 제정과 해석, 집행 과정에 공적 검증과 숙의 절차를 도입해 특정 권력이나 이념이 ‘정의‘를 독。적으로 규정하지 못하게 견제하고 ‘법 너머의 원리’를 불러들이는 헌법적 장치를 강화해 다수결도 넘을 수 없는 최소한의 공동선을 제도화할 필요성이 있다.
다만 현실 사회를 지탱하는 법의 그물망은 한층 더 촘촘하고 비대해졌다. 도덕이 공적 담론에서 힘을 잃은 사회는 법이 사람과 사회를 이끄는 유일한 가이드라인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종교적 권위도, 공동체의 관습도, 보편적 윤리도 빛을 잃은 빈자리를 법이 홀로 메우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듯 초월적 기준을 상실한 법은 언제든 권력과 독선의 도구로 타락할 위험이 있다는 。이다. 이를 바로잡은 가장 극적인 장면이 바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다. 나치 정권이 저지른 참혹한 학살 범죄는 독일 실정법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는 사실로 면죄부를 줄 수 없고 국가권력 또한 인간의 존엄이라는 보편적 규범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천명한 것이다. ‘사후법(ex post facto law) 적용’이라는 법리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절차적 정당성만으로 포섭할 수 없는 악(惡)에 대해서는 사후적으로라도 실정법을 초월한 규범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무 기준도 세우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이 재판을 정당화했다. ‘실질적 정의가 절차적 정당성과 충돌할 때, 무엇이 우선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열려 있지만 뉘른베르크는 적어도 ‘법 너머의 기준’ 없이는 국가범죄를 심판할 언어 자체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결국 법이 다시 정의에 봉사하게 만드는 출발.은 법 바깥에 존재하는 도덕적 기준을 공적 담론의 중심 무대로 복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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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는 정의의 창조자가 아니라 정의의 봉사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법은 국가의 의지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국가권력 자체를 정의의 테두리 안에 묶어 두는 질서여야 한다.
그러나 갖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과 정의는 공동체의 존립과 지속을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골격이 ‘정의‘라면, 정의의 구조를 짜 맞추는 기본적 얼개가 ‘법‘이다. ‘법‘은 한 사회의 공동체 유지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정의의 잣대이고, ‘법‘에는 더 나은 정의의 패턴을 만드는 창조적 사명이 내재해 있다. 19세기 영국의 노예무역 폐지 과정은 이 。을 잘 보여준다. 당시 노예무역은 엄연히 합법이었고 이를 지탱하는 경제적 이해관계도 견고했다. 그러나 윌리엄 윌버포스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성경적 확신에서 출발해 수십 년간 여론을 조성하고 의회를 설득했다. 결국 1807년 노예무역 폐지법이, 1833년에는 노예제 폐지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는 법이 견고한 기득권의 틀에 머무르지 않고, 더 온전한 정의를 향해 쇄신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동시에 쇄신의 동력이 힘에 의한 강요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설득과 논증이었다는 。도 주목할 만하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입각한 보편적 정의를 깊이 성찰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옳고 그름의 기준을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 아울러 사회의 공적 광장에서도 신앙적 확신이 왜 모든 인간의 존엄과 모든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는지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고 논증할 책임이 있다. 윌버포스의 사례가 보여주듯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만 양심과 이성의 언어로 성실하게 설득해 나갈 의무가 있다. 법을 더 나은 정의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힘은 결국 강제가 아니라 진실하고 끈질긴 설득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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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장 어려운 질문은 남는다. ‘누가 보편적 정의를 결정하는가?’ 포스트모던의 경고가 의미있는 것도 바로 이 지.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보편적 정의로 위장할 수 있고, 당연히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므로 보편적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권력에 대한 자기 절제와 끊임없는 자기 검증이 필요하다. 성경적 정의를 말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판단까지 자동적으로 절대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완벽한 답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진리의 기준 자체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잣대 앞에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부단히 자신을 성찰하는 겸손한 태도다. 정의가 시대의 욕망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기준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탈진실의 시대에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공적 책임이다.
결국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보편적 정의(Universal Justice)’라는 도덕적 닻?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뿌리내린 인간의 생명과 존엄, 양심과 종교의 자유, 권력의 거룩한 절제, 언약적 책임과 신뢰, 그리고 성경이 증언하는 약자를 향한 공의의 보호 등과 같은 가치들은 결코 시대적 취향으로 환원할 수 없다. 인간과 국가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 정의를 인정한다면 대통령도, 국회도, 법원도, 다수의 여론도 그 기준 아래 놓인다. 오늘의 입법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정의‘로 포장하려 할 때, 오늘의 행정이 재량을 자의로 바꿔치기할 때, 오늘의 사법이 특정 여론에 편승해 상위 규범을 외면할 때, 바로 그 순간마다 이 닻을 다시 내려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의 절대화를 막는 가장 강력한 사상적 방파제다. 이 공동선의 기준을 정립하는 일에 ‘원칙을 가진 설득’과 ‘책임 있는 참여’를 해야 한다. 명백한 사실을 거듭 외치는 것은 지성을 가진 사람의 첫 번째 의무다.
이은경 변호사(법무법인 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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