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예슬이 소속되었던 극단 애인은 내년으로 창단 20주년을 맞는다. 그리고, 예슬 역시 애인의 역사와 똑같이 연극 경력이 19년차.
지난 5월 초에 보러 간 극단 애인의 신작 〈비롯되다〉 프로그램북에는 “이제 극단을 떠나 새로운 길을 떠나는 예슬”이라는 단원들의 글이 여러 곳에 실려 있었다. 자신의 인생 절반 이상을 극단 애인과 연극하며 살았던 예슬의 마음이 어떨까. 중증 지체장애인으로 구성된 극단을 만들고 지금껏 늘 예슬 곁에 있던 김지수 대표의 마음은 어떨까, 그리고 또 단원들의 마음은 어떨까. 제3자임에도 서로의 마음을 차마 헤아리기가 힘들어 아득해졌다.
▲ 올해 서른일곱인 강예슬은 19년차 연극인이다. 연출가이며, 장애인 활동지원 일도 하고 있다. [촬영-고주영]
연극과 장애를 만난 열여덟 살
올해로 서른일곱인 예슬이 19년차 연극인이라는 건, 10대 때 연극계에 입문했다는 얘기다.
“집안의 사정 때문에 고2 때 다른 도시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야만 했어요. 근데 어차피 여름방학 보충수업 때 고3 진도까지 다 나갔으니 더 다닐 필요가 있나, 싶어서 자퇴를 결정했죠. 그래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상태였는데, 사촌 오빠가 ‘극단 애인이라는 곳에서 사람을 뽑는다는데 가보겠냐?’고 하는 거예요. 사촌오빠가 공공극장에서 하는 아카데미에서 공연일을 배우고 있었는데, 거기 강사 중 한 분이 극단 애인의 초창기 멘토였던 윤정환 연출(극단 산)이었던 거죠. 애인이라는 장애인극단이 만들어졌으니 수강생들한테 가서 일을 도우라고 했는데, 수강생인 사촌오빠가 아니라 제가 가게 된 거예요.”
“그때까지 연극을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고, 장애인을 만나본 적도 없었”던 열여덟 예슬이 극단 애인을 찾아가고 정착을 한 이유가 뭘까.
“지금 돌이켜보면 어딘가 소속되고 싶고 집 밖으로 나가서 활동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는 세계라 그냥 가봤어요. 그때만 해도 김지수 대표는 잠시 생업으로 바빴고 단원들은 대부분 나이 차도 꽤 나는 남성 장애인이었거든요. 그런데 너무 좋은 거예요. 처음으로 간 곳이 어느 대학의 동아리방 같은 곳이었는데, 거기서 단원들이 희곡을 읽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단원들에게서 ‘예슬이는 어떻게 생각해?’ ‘이건 왜 이렇게 썼을까?’ 그런 질문을 받으니, 생각이란 걸 하게 되고 제 이야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왜 우리 연극교육할 때 꼭 쓰는 ‘자기표현 증진’ 그런 말 있잖아요. 그거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런 게 재미있어서 계속 애인에 나갔어요. ‘단원’ 뭐 그런 개념도 없고 배우를 해야겠다, 연출을 해야겠다 그런 개념도 없었지만, 비장애인들은 단원을 서포트하는 역할들을 하니 ‘나도 그런 역할을 하면 되려나’ 하던 차에 ‘단원 하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당연히 ‘네’ 했죠. 단원은 회비를 내는데 저는 청소년 할인 받아 한 달에 5천 원씩 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모임 장소 연락하고 의견을 물어 시간 정하고 그런 일을 했어요. 지금 보면 매니지먼트 같은 거죠.
그러다가 ‘연출부’를 해보고 싶다고 제가 직접 얘기했어요. 특별히 장애인 단원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는 룰 같은 게 ‘애인’에는 없었어요. 작가를 지망하는 장애인 단원도 있었고, 지금은 배우인 단원도 처음엔 사진촬영 역할로 들어왔거든요. 그냥 연출부가 하는 희곡 분석 같은 일이 재미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연주 연출(극단 전화벨이울린다)이 극단 애인에서 〈장애인의 몸짓으로 풀어낸 고도를 기다리며〉(2010) 연출을 맡았는데, 저에게 조연출을 제안했고, 그래서 본격적인 연출일을 시작했어요.”
▲ 2011년 12월 성미산마을극장에서 상연된, 장애인의 움직임과 언어로 재해석한 〈고도를 기다리며〉(극단 애인, 이연주 연출) 장면. [인터뷰이 제공]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에 매력을 느꼈다거나 연출로서의 각오를 다지고 극단 생활을 시작한 게 아니듯, 장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보가 없어서 그랬는지, 편견도 없었어요. 그냥 좋은 얘기 해주는 선배들이었죠. 첫날 같이 식사하러 갔는데, 조력이 필요한 분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요. 턱이 있어서 못 가는 가게가 있으면 다른 가게 알아보고, 휠체어 보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곳이 있으면 같이 욕하고 나오고. 장애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건 단원들과 함께 ‘장애학’ 스터디를 하면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각자 일상에서 불합리한 일들을 겪고 있었는데, ‘그게 구조적인 거였구나’를 함께 각성하기 시작한 거죠. 그게 여성학으로 이어지고, 각자의 인생 스토리 쓰기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나를 더 잘 알게 되고 세상을 알게 되기도 했죠.”
‘장애미학’보다 더 중요한 것, 배우가 잘 보이는 연극
연출부로 일하다가 2014년에 연출 입봉을 앞두게 되었다. 이연주 연출이 예슬의 첫 연출 데뷔를 위해 장애 형제의 이야기인 〈너는 나다〉 대본을 써줬다.
“근데 제가 연습 중간에 한 달 휴가를 냈어요.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사람들이 다 저를 비난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두려웠어요. 그런데 그 한 달 동안 또 많은 일이 있었어요. 엄마가 입원해서 간병을 했고, 병실 텔레비전으로 세월호 참사 사건을 목도하기도 했고요. 한달 후에 극단으로 다시 돌아와 맡은 연출 역할을 할 때 그런 일들이 힘이 된 것 같아요. 떠나기로 한 게 아니고 돌아온다고 한 것에 대한 책임감, 급박한 상황에서 기다려준 극단에 대한 감사함이 저를 움직이게 해줬죠.
그 이후로 연출 작업을 하면서 지향했던 것은 ‘배우가 잘 보이는 연극’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장애인극단이라서 그러냐고 물어본다면, 글쎄요, 저는 굳이 따지면 ‘장애연극’만 해온 사람이어서 그런 구분이 없어요. 저에게 연출을 가르쳐줬던 김지수 대표와 이연주 연출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뜻맞는 장애인들과 함께 장애인의 일상뿐 아니라 문학적 취향에 기반한 작품을 신나게 만들고 공연하면서 예슬에게도 연극 경험과 연출 경력이 한창 늘어나던 2020년 12월,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활동지원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졌다. 관련 공공기관이 생기면서 연극을 포함한 장애예술이 제도화의 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장애예술에 대한 공공 지원금이 놀라운 속도로 늘어나고 전용 공간들이 생기고 ‘장애예술’에 대한 담론도 급격하게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공공, 제도와 상관없이 20년 가까이 장애연극을 해온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변화가 어떻게 감지되었을까.
“극단 애인도 여러 공공 지원금을 받기 시작했어요. 당혹스럽고 두려웠어요. 적어도 나는 ‘장애예술’을 카테고리화 하지 않고 ‘그냥 연극’을 해왔는데, 이런저런 개념들이 들리면서 더 어렵고 더 두려워졌어요. 그래서 중간에 안식년을 갖기도 했고, ‘나는 뭘 해야 하지’라는 혼자만의 싸움을 그때부터 시작한 것 같아요.”
▲ 2024년 11월 모두예술극장에서 공연된 극단 애인의 낭독공연 〈없던 공연-어느 장애연극인들의 욕망에 대한 기록〉(김지수·강예슬 작, 강예슬 연출) 장면. [인터뷰이 제공]
극단 애인은 이 거대한 흐름 안에 있으면서도 그 흐름에 맞서고 저항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4의 벽〉(강예슬 각색·연출, 성북마을극장, 2022)과 〈없던 공연-어느 장애연극인들의 욕망에 대한 기록〉(낭독공연, 김지수·강예슬 작, 강예슬 연출, 모두예술극장, 2024)에서 본 애인은 어쩌면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20년 가까이 활동해온 여러 장애인 극단들이 있는데, 마치 장애연극이 이제야 나타났다는 듯 넘쳐나기 시작한 장애예술의 미학, 장애연극의 미학, 장애인 배우의 연기미학에 대해 오가는 말들에 대해, ‘우리의 미학은 이런 것’이라고 반박하는 것 같아 보였다.
“‘장애미학’이라는 단어가 자꾸 들려왔고, 그것에 맞춰 무언가를 만들어야만 될 것 같고, 그에 걸맞는 표현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고…. 그런데 이미 우리가 해온 것들도 있는데. 우리가 해온 건 어떤 언어로 설명해야 하나, 그런 것에 대한 갑갑함이 있어서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걸 밖을 향해서 공연으로 얘기해보긴 하지만 딱 떨어지는 답은 없으니 너무 무책임하게 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도 동시에 있었고요. 그래서 어려워졌어요.”
거리를 두고 보니, 더욱 가까워진 연극
열여덟부터 시작한 연극 인생, 하고 싶은 것도 생각도 많은 청년기에 방황이 없었을 리 없다. 수능을 보기도 하고, 연출 전공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기도 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직장을 다닌 적도 있었다. 공연이 제일 많았던 2018년, 아무리 해도 연극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공부를 해보자 싶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청소년교육학과에 입학도 했다. 2021년에는 스스로를 시험에 빠트려 볼 심산으로 일 년간 안식년을 선언했다.
“연극을 많이 보지만 그것도 단원들과 함께였지, 내가 혼자라면 연극을 그렇게 보러 다닐까? 내가 진짜로 연극을 좋아하는 걸까? 연극을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 걸까? 연극과 거리를 두면 다시 하고 싶어질까?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거예요.”
일 년 후의 결론은 “나는 연극밖에 할 줄 아는 게 없구나. 연극하고 싶다, 연출하고 싶다”.
“연극만큼 나를 알 수 있는 방법도 없는 것 같아요. 타인도 알게 되지만 사실 스스로를 더 많이 알게 되죠. 그리고 생각하게 만들어주고요. 연극 만들고 공연을 보니까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저를 공부하고 나를 생각하고 세상을 보게 만들어주는 게 연극인 것 같아요.”
그리고 안식년에서 복귀한 2022년에는 〈달구지〉라는 개인극단까지 창단했다.
“강예슬이라는 개인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어요. 장애인극단에 장애인활동지원사까지 하는 저의 정체성과 장애를 떼어놓을 수는 없으니,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하는 연극을 통해서요. 근데 1년 정도 활동하고 휴업 상태예요. 하하.”
연극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애인’이었다
2023년 김지수 애인 대표가 극단 해산을 걸고 대표직을 내려놓은 일이 있었다. 단원들의 의지로 결국 해산은 하지 않았지만, 새로 대표를 맡은 배우가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나면서 극단의 존폐가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때 알았어요. 우리는 연극이 아니라 관계로 이어져 있구나. ‘애인’이 없어지면 그 관계가 다 끊어질 것 같아 두려웠어요. 극단 애인이 나에게 무엇인지를 계속 고민하던 기간이었고, 그 시기를 겪으면서 애인에 대해 제가 가진 애정, 애인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확고해진 것 같아요. 그때 정말 ‘극단을 없애자’라고 결론이 나면 모든 게 다 끝날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오히려 그 일을 겪고 공연을 하면서 내가 없다고 애인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나도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일을 해나가고 싶어졌고요.”
▲ 올해 5월 대학로 이음아트홀에서 공연된 극단 애인의 연극 〈비롯되다〉(김지수 작, 강예슬 연출) 연습실에서 예슬의 모습. [인터뷰이 제공]
예슬은 2025년에 결혼을 결심했다. 오래 만난 남자친구가 있었고,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예슬의 탈단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아마도 나처럼 김지수 대표를, 단원들을 떠올렸을 테고 걱정도 했을 터다. 그도 그럴 것이 극단 애인은 창작은 물론, 공연계에서도 소문난 프로 관람러들이고, 때때로 극단 여행도 떠나는 돈독한 사이인 데다가, 지난 10여 년간 예슬은 김지수 대표의 장애인 활동지원사이기도 했다.
“처음엔 서운하더라고요. 다들 ‘애인 어떻게 해?’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내가 결혼한다는데 왜 축하보다 걱정을 더 하는 거야? 하하. 인생의 반이 애인이에요. 제 인생 제가 살아온 인생의 반이 애인과 함께한 시간. 제 인생이 애인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는데, 애인에 와서 배운 모든 것에 지수 언니의 영향이 제일 크거든요. 사람과 대화하는 법부터 청소를 하는 법, 관심 있는 사람과 친해지는 법, 고민을 털어놓는 법, 하다못해 애인에 들어와서 성인을 맞았으니 술도 지수 언니한테 배웠는 걸요. 결혼식 날, 엄마를 보고도 눈물이 안났는데, 지수 언니를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지금도 눈물날 것 같아요.”
‘애인’을 떠나도,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결혼을 했기 때문에 연극을, 극단을 그만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는 곳의 문제가 크다. 예슬이 결혼 후 생활하게 된 곳은 남편의 고향인 전라남도 신안이다. 지금도 극단 단톡방에서 나가지 않았고, 줌 회의에 껴달라고 하고, 지금 하는 이 인터뷰도 애인의 지방공연에 무대감독으로 참여하고자 연습 차 상경한 서울의 애인 연습실에서 진행했다.
“내가 진짜 연극을 그만뒀나 애인을 그만뒀나, 떠났다고 진짜 말할 수 있나, 혼동은 아직 있어요. 너무 미련 남은 사람처럼 굴고 있나, 그런 고민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미련이 남아 있는 대상은 연극이 아니라 애인이에요. 어떻게든 곁다리를 하고 싶다, 어떻게든 연결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어요.
제가 떠난 후에 애인이 어땠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그냥 애인이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년이 창단 20주년이거든요. 해산 사태 때 20주년 기념공연하고 해산하면 어떨까, 혼자 생각하기도 했었어요. 근데, 계속 연극해줬으면 좋겠어요.”
▲ 전라남도 신안으로 이주한 예슬은 지역에서의 앞날을 모색하고 있다. [촬영-고주영]
동그런 안경을 쓰고, 항상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 우렁차고 똑부러지게 답하고, 호탕하게 웃는 예슬이 신안에서, 연극문화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곳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어떨 땐 좋고 어떨 때는 너무 고독하고 답답하고 갈 데 없고... 하하. 운전 안 하면 동네 슈퍼에도 갈 수 없게 돼서 장롱면허를 꺼내 운전을 할 수 있게 됐어요. 광주 같은 대도시에서는 좀 어렵지만요.
장애인 지원기관이나 장애인 활동지원 일을 생각하고 있어요. 장애인과 만나는 방식이 기관과 활동지원은 전혀 다르잖아요. 저는 역시나 사람, 그 사람의 삶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결국 활동지원을 선택하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사람을 만나면 또 연극을 하게 될 수도 있고요. 요즘도 문화재단 들어가 지원사업 찾아보기도 해요 하하. 그래서 알았어요. 아, 난 이걸 놓고 싶지 않구나.”
[필자 소개] 고주영 : 몇몇 예술축제와 지원기관을 거쳐 2012년부터 공연예술 독립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안산순례길 프로젝트](2015~2019), [플랜Q 프로젝트](2018~2023), [연극연습 프로젝트](2018~현재)를 기획·제작했고, 하고 있다. 연극과 연극 아닌 것, 극장과 극장 아닌 것, 예술과 예술 아닌 것 사이에 있고자 한다. 2007년부터 〈일다〉에 일본 제휴 매체인 〈페민〉의 기사를 번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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