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재용씨의 강제 징용 아픔이 배인 자료들. 왼쪽 '자유한인보'는 하와이 포로수용소 생활 당시 조선인들이 자체적으로 발행한 소식지.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일제강.기 남태평양 밀리환초에 강제 동원됐던 광주 출신 피해자가 당시 참상을 직접 증언한 육성 녹음테이프가 42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22일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에 따르면 전남광주 남구 봉선동에 거주하는 이주연(70)씨는 최근 부친인 고(故) 이재용씨의 육성 녹음테이프와 녹취록을 공개했다.
테이프는 1984년 이씨가 부모의 성장 과정과 집안 내력을 기록하기 위해 집에서 직접 녹음한 것으로 모두 6개 분량이다. 이 가운데 '아버지 하와이 이야기'와 '아버지 하와이 젊은 시절'이라는 제목의 테이프에 남태평양 강제동원 당시 상황이 담겼다. 녹음 당시 이재용씨는 75세였다.
1908년 전남광주 남구 양림동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난 이씨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3월께 33세의 나이로 일본 해군 군속으로 동원됐다.
전국 각지에서 부산항에 집결한 동원 피해자들은 일본 해군 수송선을 타고 약 5천600㎞ 떨어진 남태평양 마셜제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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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에서 동원된 이씨는 밀리환초에 도착한 뒤 비행장 활주로 건설 현장에 투입됐다.
이씨는 당시 상황을 "전라남도 800명, 전라북도 800명, 충청남도 800명, 충청북도 800명, 경상남도 800명, 경상북도 800명 등 4천800명이여"라며 "부산에 모아 놓으니까 어마어마했다"고 회상했다.
밀리환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굶주림과 고된 노동이었다.
이씨는 "9시가 되면 일을 하러 나가. 밥을 주는디 하루에 한 끼니씩밖에 안 준다. 어디 배고파 살것냐"며 "비행기장을 다듬는데 한이 없제. 기한이 없어"라고 증언했다.
낮 동안 중노동에 시달린 뒤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밤이면 미군의 공습을 피해 방공호로 몸을 숨겨야 했다.
그는 "저녁에 숙소로 들어가서 잘라고 하는디 공습이 왔다"며 사람들이 먼저 몸을 피하기 위해 방공호로 몰려들었던 당시 긴박한 상황도 육성으로 남겼다.
1944년 미군이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섬에 있던 조선인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내몰렸다. 이씨는 1945년 4월 밀리환초를 빠져나와 미군 포로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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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일본 해군 신상조사표에는 당시 이씨의 행적이 '도망'으로 기재돼 있다.
이후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한 이씨는 1946년 1월 하와이를 떠나 일본을 거쳐 같은 해 2월 인천항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은 이씨가 귀환 당시 가져온 것으로 전해지는 낡은 연두색 수건도 함께 공개했다. 가족들은 이씨의 강제동원 시절 한과 기억이 담긴 유품으로 여기며 수십 년간 보관해왔다.
딸 이주연씨는 "3대 독자였던 아버지가 머나먼 남양군도로 끌려가 고생하는 동안 어머니는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바라며 날마다 기도했다고 들었다"며 "우리 민족이 일본 때문에 고통받았던 역사적 사실이 한 사람에게라도 더 기억됐으면 하는 마음에 자료를 공개했다"고 말했다.
한편 밀리환초는 일제강。기 전남 출신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강제 동원된 곳이다. 시민모임이 제시한 기록에 따르면 1942년 3월 전남 출신 800여명이 이곳에 동원됐으며, 이후 미군의 해상봉쇄에 따른 식량난과 일본군에 의한 학살 등으로 3년여 동안 최소 218명의 조선인이 숨지거나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주연씨가 "아버지가 하와이 포로수용소를 거쳐 귀국할때 가져 온 것"이라며 낡은 타올 한 장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시 상황이 담겼다.